국제결제은행(BIS)의 사무총장 데 코스(Pablo Hernández de Cos)가 일본은행 세미나에서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BIS는 각국 중앙은행 간 정책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기구로, 이번 데 코스의 발언은 단순 개인 의견을 넘어 BIS가 스테이블코인을 바라보는 실무적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번 세미나에서 BIS는 스테이블코인을 특정 자산, 특히 달러에 가치를 고정하는 구조를 가진 디지털 토큰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테이블코인이 독립적 화폐가 아닌, 달러 신뢰를 빌려쓰는 금융상품일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스스로 신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기존 통화 시스템의 신뢰를 끌어다 사용하는 형태에 가깝다는 뜻이죠. 즉, 스테이블코인이 독립적인 화폐라기보다는 기존 화폐 시스템 위에 얹혀 있는 파생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 BIS의 출발점입니다.
겉으로 본다면 이미 스테이블코인은 거대한 시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총은 약 3,150억 달러 규모이고, 연간 거래량만 보더라도 35조 달러에 달하는 수준이죠. 하지만 BIS는 이 중 실 결제 사용이 3,900억 달러 수준에 머무른다는 내용을 지적했습니다. 즉, 스테이블 코인이 실물 경제에서 사용되는 비중은 상당히 제한적이며, 여전히 대부분의 거래는 크립토 생태계 내부에서 거래소 간 이동이나 파생상품 운용, 담보 활용 같은 목적이 중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스테이블코인이 아직까지 화폐가 아닌 ‘유동성 도구’에 가깝다는 의미죠.
BIS는 진짜 화폐의 기능으로 단일성(singleness)과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일성이란 어디서든 동일한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성질입니다. 쉽게 말해 ‘1USDT = 1USD’냐의 문제죠.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상황에 따라 가격이 흔들릴 수 있고, 환매 조건이나 유동성에 따라 실 가치가 달라질 수 있죠. 1달러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1달러로 기능해야 하지만, 환매 과정에서의 USDT는 최소 금액이라던지, 수수료가 있다던지, 혹은 거래소 프리미엄에 따라 가격이 다르게 형성된다는 점에서 ‘같은 돈이지만 값이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는 의미입니다. 디페깅이라는 것도 결국 단일성 붕괴의 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겠고요.
다음으로 BIS는 상호운용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은행에서의 1만원을 하나은행에서 받을 수 없다면?”
말도 안된다 생각하지만, 실제로 스테이블코인에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같은 이름의 스테이블코인이라도 서로 다른 블록체인 위에서는 완전히 다른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더리움 체인 위에서 존재하는 USDC와 솔라나 체인 위에서의 USDC는 아직까지 완벽한 호환을 지원하지 않죠.
물론 이를 연결하기 위한 브릿지나 추가 인프라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비용이 발생한다는 부분, 브릿지가 해킹당한다는 내용 등 변수를 생각해본다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게 BIS의 논리입니다. 결국 이들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은 통합된 화폐 네트워크가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파편화 되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단순히 기술 문제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반의 안정성과도 연결됩니다. BIS가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스테이블코인은 환매 약속과 준비금 구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신뢰가 흔들릴 경우 전형적인 ‘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 사례에서도 특정 코인의 신뢰가 깨지면서 가격이 급격히 이탈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었고요.
따라서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확산될 경우 은행 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금이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동하게 되면 은행의 자금 조달 구조가 변화하고, 이는 대출 축소나 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단순히 크립토 시장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실물 경제까지 연결되는 경로가 열리는 셈입니다.
BIS는 스테이블코인 확대에 따른 통화 주권 위협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대부분은 달러 기반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단순 글로벌 결제 수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달러 영향력을 디지털 형태로 확장하는 패권 경쟁과도 연결되죠. 특히 통화 신뢰도가 낮은 국가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의 대체 통화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금리를 올리는데도 물가는 잡히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또한 중앙은행 입장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됩니다.
다만 이 보고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몇 가지 짚고 넘어갈 내용들이 있습니다. 먼저 BIS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중앙은행 중심의 금융 구조를 전제로 합니다. 신뢰는 중앙에서 만들어진다는 전제가 깔려 있고, 그 외의 방식은 잠재적 리스크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죠. 하지만 이는 화폐에 대한 철학 문제일 수도 있고, 최근 시장에서는 온체인 데이터 공개나 실시간 준비금 검증 같은 방식으로 다른 형태의 신뢰 모델도 실험되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 속도에 대한 평가 역시 다소 보수적인 편입니다. 확장성 문제나 수수료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레이어2나 새로운 구조의 블록체인이 등장하면서 빠르게 개선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의 한계를 미래의 구조로 그대로 투영하는 것은 다소 이른 판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결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실제 시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담보, 유동성 공급, 디파이 기반 자산 등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층적인 기능을 고려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왜 이 자산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그래서 결국 화폐가 아닌 토큰이잖아’를 강화시키는 논리가 될 수도 있겠네요).
전체적으로 BIS는 스테이블코인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도 1) 일부 기능을 인정하되, 2) 미완성인 만큼 중앙은행 베이스의 신뢰 구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번 발언에서 원색적인 단어는 직접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전체적으로는 규제를 피해갈 수 없다는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추후 은행권의 스테이블코인 시장 참전, 혹은 CBDC가 다시 탄력받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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