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 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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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빨, 기획을 보는 기획PD의 눈

"소재빨이 있어야 당선 된다."

"소재빨이 있어야 편성 된다."

사실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우 유리합니다.

소재가 주는 직관적인 재미,

즉, 후킹(Hooking)이 되느냐는 드라마 기획PD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캐스팅을 위해서,

혹은 투자를 받기 위해 기획을 설명해야 할 때,

"이건 끝내주는 청춘들의 꿈과 사랑에 대한 얘기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열에 아홉은 호기심을 갖지 않을 겁니다.

남은 한 명도 확신은 없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가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청춘을 이야기하면서 꿈과 사랑을 빼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죠.

다만 콘텐츠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이 정도로 순수하게(?) 승부를 보겠다는 태도가 얼마나 무모한지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은 작가들이 있습니다.

작가는 태생적으로 무언가에 꽂히면,

마치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니까요.

동료 작가의 입장에서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저 역시 응원합니다.

실제로 잘 풀리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누가 말려서 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PD의 시선으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후킹 없으면 저는 픽 안해요."

그렇다면 후킹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대감.

그 기대감은

자극일 수도 있고,

강한 공감일 수도 있고,

혹은 환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초토화 된 사회에서 살아남는 이야기"

라고 한다면,

지금 시대엔 전혀 끌리지 않습니다.

좀비물이 막 유행하던 10여 년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너무 많은 좀비물에 노출된 지금의 시청자에게는

탁월하게 신선한 포인트가 없다면 기대감을 주기 어렵습니다.

<부산행>, <지금 우리 학교는>, <킹덤>, <해피니스>, <스위트홈> 등

독특한 콘셉트를 더한 좀비물들이 이미 충분히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 이후의 데스게임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은 한동안 수많은 데스게임 기획으로 가득 찼습니다.

OTT가 마구 출범하던 때이니 오죽했겠습니까.

<피라미드 게임>, <밤이 되었습니다>, <더 에이트 쇼>

정도가 제작이 되어 방영 됐으나,

그대로 뭍혀버린 기획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데스게임에

새로운 컨셉을 접목 못해서가 아닙니다.

데스게임이라는 소재 자체에 피로감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자경단, 사적복수 등의 기획은 또 어떤가요?

<모범택시>, <비질란테>, <더 글로리>... 더 말 할 것도 없죠.

그럼 이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건데!"

제가 말하고 싶은 건,

후킹이 ‘자극성’에 의존한 기획은

첫 스타트가 아니고서는 외면받기 쉽다는 점입니다.

다시 돌아가 봅시다.

후킹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대감’이라고 정의했을 때,

어떤 해석이 대중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건 끝내주는 청춘들의 꿈과 사랑에 대한 얘기입니다"

가 아니라

“심판 매수로 선수 자격을 상실한 펜싱 유망주 김PD가,

금메달을 빼앗기고 사브르를 내려놓았던 소꿉친구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빼앗긴 금메달을 되찾아주는 이야기”

라고 말한다면, 훨씬 감정적인 소재가 됩니다.

꿈과 사랑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안에 포함돼 있고,

강렬한 관계적 긴장감도 생깁니다.

청춘물인 동시에 스포츠물의 성격도 자연스럽게 드러나죠.

하지만 여기서,

조금 잔인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솔직히 청춘물은 애초에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청춘물? 캐스팅이 되겠어?"

"돼도 20대 초반 배우? 티켓파워 없잖아."

"청춘물 요새 시청률 바닥이잖아."

이렇게 판단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청춘물은 하지 말아야 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기획이든

시의적절하고 탁월한 소재가 아니라면

비슷한 꼬리표는 늘 따라붙습니다.

결국 이런 편견은

대본으로 넘어가야 깨지는 문제고,

캐스팅 단계까지 가봐야 판단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기본적인 실력입니다.

또한,

모든 작가가 기획력에 강점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작가는 소재보다 주제와 감정에 강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제2의 노희경, 박해영 작가님이 되시겠죠.

그러니 내가 기획력이 좀 약하다고 해서 좌절할 문제는 아닙니다. 충분히 고민하면 좋은 기획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편성되어 나오는 드라마들을 보면,

적지 않은 기획들이 아주 오랜 시간 시장을 떠돌다

뒤늦게 제작됩니다.

바로 콘텐츠 시장의 속성 때문입니다.

많은 기획자와 제작자, 편성권자들의 손에는

이미 훌륭한 선택지들이 쥐어져 있습니다.

(대본의 재미만을 훌륭한 선택지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다행히 콘텐츠는 빠르게 소비되고,

시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합니다.

그때,

빛을 잃지 않은 괜찮은 기획이 살아 있다면

기회는 옵니다.

그리고 늘, 시장의 예상을 뒤엎는 흥행작이 등장합니다.

다시 지구력 싸움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무조건 될 법한 기획에만 매달리기보다,

눈길이 가고, 감정을 움직이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기획을

대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재빨이 있어야 당선된다.”

“소재빨이 있어야 편성된다.”

맞는 말이고, 분명히 유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소재빨'을

이야기가 가진 기본적 가치를 뛰어넘는 무엇으로 해석하면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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