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안은 다 재미있어요."
"기획안은 원래 재미없어요."
기획을 검토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정반대의 뜻이지만, 놀랍게도 같은 말이다. 결국은 대본을 봐야 다는 것이다.
드라마 기획안은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글이 아니다. 업계 관계자들에게 선보이는 글이다.
제작사는 기획안을 통해 편성 가능성을 점친다. 작가는 누구인지, 소재는 눈길을 끄는지 본다.
편성권을 쥔 플랫폼은 기획이 돈이 될지를 볼 것이고, 감독은 이야기의 구조와 작가의 의도를 살필 것이다.
배우는 제안받은 캐릭터가 매력적인지를 검토할 것이다.
그러니 작가들은 기획안을 재미있게 쓰려고 무진 애를 쓴다. 막상 대본은 기대에 못 미치는데, 기획안만큼은 재미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기획안은 본질적으로 설명적인 글이다. "이거 재미있어요!"라는 주장이다. 인물이 움직이고, 감정이 드러나고, 긴장감이 흐르는 대본의 재미에 비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기획자들은 '기획안은 원래 재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획안을 흥미 없게 본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재미있게 포장을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알맹이 없이 재미있어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 어떤 이야깃거리가 제대로 있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기획안에서 중요한 것은 흥밋거리, 이야깃거리가 제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흥밋거리'는 대체로 소재가 주는 기대감이다.
가상현실에서 완벽한 남자들과의 환상적인 연애를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월간남친>이나, 답답하고 억울한 세상에 통쾌한 사적 복수를 대신해 주는 <모범택시>시리즈는 소재만으로도 직관적인 기대가 생긴다.
작가가 떠올린 눈길을 끄는 필살 소재가, 인물과 줄거리로 이어지며 기대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대와 달리 평이하거나 엉뚱한 이야기로 이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야깃거리'는 서사의 확장성 문제다.
호흡이 긴 드라마에서는 12부, 16부까지 끌고 갈 만한 인물과 사건의 동력이 중요하다. 단지 줄거리가 길거나 작가 나름대로 회차를 구분했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사건이 반전을 거듭하며 계속 긴장감을 유지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기획안은 줄거리 속 핵심 사건과 결정적인 반전은 보이지 않은 채, 미사여구만 장황하게 이어진다. A와 B가 벚꽃이 흩날리는 산책로에서 별똥별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은 대본에서 살아나야 할 장면이지 줄거리에서 길게 설명할 대목은 아니다.
편성에 사활을 거는 작가가 요령을 피웠을 리는 없다. 분명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써낸 결과일 것이다. 다만 기획안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놓친 경우일 것이다.
반전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유효한 것 중 하나는 인물 관계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조력자가 적대자가 되고, 적대자가 조력자가 되는 식이다.
웨이브 오리지널 <약한영웅> 은 주인공이 자신을 위협하는 일진들과 맞서는 이야기다. 이런 유형의 서사는 강한 악인이 계속 등장한다고 해서 긴장감이 유지되지 않는다. 비슷한 구도의 반복은 지루함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정을 쌓았던 친구가 변절해 적대자로 돌아선다. 이는 주인공의 격렬한 내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갈등 양상의 변화인 것이다.
긴 서사의 핵심이 인물 관계에 있다는 점은 50부작 이상의 일일드라마 통해 잘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출생의 비밀이 애용되었다면, 최근에는 남녀 주인공의 양가 부모님을 활용하는 추세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결심한 남녀가 양가 부모님이 알고 보니 과거 연인이었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식이다.
이런 반전은 잘 이어지던 인물 관계를 뒤흔들고, 서사는 그 에너지로 힘 있게 나아간다.
이렇듯 기획안에서는 핵심 사건이 힘 있는 반전을 통해 계속 확장되어야 한다. 인물 관계에서든 줄거리에서든 그런 전환의 지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관계자들은 결국 이렇게 묻게 된다.
“이게 정말 드라마가 될까?”
핵심 없는 미사여구의 반복은, 기획안에서 알맹이를 찾는 관계자에게 피로감만 줄 뿐이다. 그럴듯한 문장을 다듬는 데 힘을 쏟기보다, 차라리 담백하고 분명하게 이야깃거리를 드러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